쉬운 목차
들어가는 말
명상은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무위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두는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그런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명상은 어떤 행위를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무위는 아무 행위를 하지 않고서 얻는 이익이 아닙니다.
1. 명상이란?
명상은 지금 여기에 흐름이고, 생각과 마음이 사라진 상태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함입니다. 무위는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그런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꾸밈이 없고 분별이 없어 경계가 사라진 흐름입니다.
이 말이 어려운가요? 명상과 무위는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늘 우리 곁에 함께합니다. 다만 생각과 마음이 지배하기에 내가 주인이 되지 못하고, 나를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명상은 ‘그저 존재함’ 그뿐, 어떠한 인위적인 행위도, 분별이나 경계나 판단도 필요 없습니다.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알아차림으로 흐르는 것이 존재입니다. 그런데 왜 흘러야 합니까? 나는 고정될 수 없기에 시공간과 함께 늘 흐릅니다. 흐르지 않고 고정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시공간과 흐르면서 지금 여기 자신의 있음을 알아차리면 그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명상입니다.
명상으로 존재함은 그 자체로서 완벽하지요. 함은 함으로써 완전하고, 머묾은 머묾으로 온전하고, 감은 감으로써, 옴은 옴으로써 완벽합니다. 그러면 그 자체로써 무위입니다.
무위는 무엇을 하든 그 자체로서 완벽하기에 생각이나 마음을 따로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분별이나 경계나 판단이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일체에 걸림이 없고, 행위에 꾸밈이 없으면, 그 무엇을 하든, 하지 않던 상관 없이 무위입니다. 이때 알아차려 의식하고, 의식으로 자각하면, 이 자각의 흐름에서 나는 존재하고, 존재는 있음으로 흐릅니다. 그러면 이 무위는 바로 명상입니다. 명상과 무위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려도 분별과 경계가 사라지면 그리는 행위만이 존재하고, 피아노 연주자가 건반을 두들겨도 생각과 마음이 사라지면 흐르는 음악만이 존재하고, 마라톤 선수가 달려도 꾸미지 않으면 행위는 사라지고 달리는 흐름만이 존재합니다. 그러면 이 모두가 명상이고 그 자체로써 무위입니다.
2. 무위란?
물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을 치더라도 물에 걸림이 없고, 새가 창공을 날아도 하늘에 날개가 꺾이지 않으며, 사람이 살아가더라도 삶에 매이지 않을 수 있으면, 해도 함에 매이지 않고, 가도 감에 머물지 않으니, 하는 자도 없고, 하지 않는 자도 사라집니다. 이것을 무위라 합니다. 무위란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그 무엇을 하더라도 꾸밈이 없으니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니 자유롭습니다.
현대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 본 적이 없습니다. 늘 무언가를 위해 도전하고 꾸며야 하며 구상하도록 철저히 훈련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위를 알 수가 없습니다. 무위마저 유위를 통해서 이해하려 합니다. 음악을 듣고, 주문을 외우고, 춤을 추고, 걷고, 뛰고, 소리에 집중하고, 시선을 고정하고, 이러한 모든 행위는 유위, 즉 의도적이고 인위적입니다. 인위적인 유위를 통해 무위에 이르려 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꾸며야 한다는 모순. 이것이 명상하려는 자들이 하는 짓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수많은 명상법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는 결코 명상에 이를 수 없습니다. 명상을 위한 행위만 있고, 정작 명상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명상이나 무위는 유위를 통해서 다가갈 수 있는 게 아니라, 꾸밈 없고 분별 없으면, 번뇌 망상이 사라진 자리에 고요함이 깃들게 됩니다. 고요함이 깃들면 환하게 열립니다. 이를 알아차리며 자각함이 명상이고 무위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명상을 시도하지만, 명상이 일어나기 어렵고, 무위 역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무위나 명상은 어떤 행위를 해도 좋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행위를 하더라도 그 행위를 꾸미지 않으면 행위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하지 않음에 매이지 않으면 걸림이 없습니다. 그때 주시자로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을 하더라도 무위고, 그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명상입니다. 무위와 명상에서만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무위에서 나는, 그저 존재할 뿐, 나는 군인도 아니고, 변호사도 아니며, 선생도 아닙니다. 아버지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회장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닙니다. 또 무엇이 되어야 할 필요도 없고 되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있음,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그래서 아무 곳에 갈 필요도, 그 무엇이 되기 위해 꾸며야 할 까닭도 없으며, 무엇을 더하고 빼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있음’ 그 자체로 흐를 때, 나는 ‘완전함’으로 자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있음을 알아차리면 충분합니다. 이 있음을 자각하며 흐르는 자, 바로 존재이며, 자기 자신입니다.
산은 나 여기 있소! 말하지 않아도
거기 그렇게 흐르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 거스르지 않고도
하늘에 오르지
바람 불면 바람에 흩날리고
비가 오면 비를 맞지
살아가는 삶에 마음 없으면
그냥 삶이고 그것이 사는 것이라
옳다 그르다 좋다 싫다 탓하지 않아도
강은 도도히 흐르고
갈등하고 분노하며 탐욕하지 않아도
해는 아침이면 밝게 드러나지
오고 감을 모르고 살아도
삶은 열리고
그래서
참으로 살아가지!
3. 마음챙김명상 방법
1) 마음챙김이란?
마음챙김은 불교명상에서 유래한 수행법입니다. 마음챙김은 인도의 빨리어 사띠(sati)에서 나온 말로 영어권에서는 약 100여 년 전에 mindfulness로 번역되었고, 우리는 마음챙김이라는 말로 최근에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마음상태를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이는 생각이나 마음의 흐름에 관여하지 않고 초연하게 바라보며 수용하는 명상법입니다. 즉, 생각과 마음을 제거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며 알아차립니다.
그러나 생각이나 마음을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생각과 마음은 과거나 미래로 떠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으로 흐르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나요?
우리 인류는 수만 년 동안 맹수나 적, 그리고 수많은 자연재해로부터 위협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늘 외부를 살피며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걱정하며 살아왔다는 뜻입니다.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현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다른 사람을 보며 그의 기분을 살펴야 하고, 세상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적응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챙길 여력이 별로 없습니다. 남들은 무엇을 하며 살아가나? 어떤 연예인이 무슨 가십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나? 주식은 무엇이 대세고, 부동산은 어디서 움직이나? 우리의 의식은 늘 외부를 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나를 들여다보는 게 익숙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흐른다는 것도 낯설기만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잃고 늘 붕 떠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 ‘맨붕’이라는 말을 만들어 낼 정도로 정신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찾아가며 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명상이 마음챙김 명상입니다. 모든 수련이나 공부가 그렇듯이 고요하고 고요하면 맑고 밝게 깨어날 수 있습니다. 이를 적적 성성(寂寂惺惺)이라 하고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 합니다. 삶에서 깨어나는 길이 명상입니다.
2) 마음챙김명상하는 방법과 효과
명상은 공기와 같습니다. 명상은 절대로 어려운 수행이 아닙니다. 너무 가깝고 너무 쉬워서 오히려 굉장히 어렵게 느껴질 뿐입니다. 공기는 언제나 나와 함께 하듯이, 나 역시 늘 지금 여기를 살아갑니다. 살아가는 모두가 명상이 아닐 수 없지만, 깨어있지 못하면 꿈속에서 헤매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너무 쉬워서 오히려 수많은 방편을 동원해야 하고,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해야 했습니다. 명상으로 가는 길은 많지만 결국 한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결국 나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명상의 첫 단계는
육체에 대해 예민하게 깨어있는 공부입니다. 몸짓 하나, 동작 하나마다 또렷하게 깨어서 알아차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마음챙김하는데 왜 몸부터 챙기라 하지요? 마음은 사실 없습니다. 없는 걸 바라본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몸부터 알아차리려는 것입니다.
몸이 움직이고 멈추는 그 느낌을 세밀하게 알아차립니다. 호흡을 주시한다면, 호흡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호흡이 일어났다 사라질 때의 몸의 변화나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그 자체를 알아차려 갑니다. 특히 들어오고 나가기 전의 쉼의 공간, 나가고 들어오기 전의 여유의 시간마저 놓치지 않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이나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우리의 생각, 즉 일어나는 사념을 주시합니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생각을 알아차립니다. 생각은 우리의 몸의 상태나 동작의 행위보다는 더 미묘하고 복잡합니다. 생각을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한순간도 고요하기 어려운 이러한 상태로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가 괴롭힘을 당해 왔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별 의미 없는 이러한 잡다한 생각과 감정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크게 자리를 차지하며 우리의 삶을 낭비하도록 이끌어 왔는지 비로소 알게 됩니다.
마음챙김명상은 생각과 감정이 벌이는 이러한 갈등과 번뇌, 분별과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찾아가는 내면의 혁명입니다. 나 자신으로 돌아와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을 바라보고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나를 찾는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이번에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기분을 바라보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섬세한 주시가 필요하지만, 사념을 주시하는 단계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됩니다. 조금 더 주의 깊은 각성이 요구될 뿐이며, 우리의 미묘한 생각과 감정 너머의 느낌, 기분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내면을 주시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내면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깊은 평온과 평화가 내면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평온과 평화가 깃들면서, 우리의 육체와 정신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알게 됩니다.
네 번째 단계는
위의 이 세 단계에 대해 깨어 있을 수 있다면, 스스로 다음의 체험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난다는 것이 또 다른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은 우주의 선물이고 존재의 향기입니다. 앞의 세 단계를 거치고 건너온 사람에게 주어지는 내면의 은혜입니다.
고요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맑고 밝게 깨어나 알아차리는 의식의 흐름마저 바라볼 수 있을 때. 즉, 알아차리는 의식과 함께 흘러갈 수 있을 때, 이것이 하나로 돌아오는 길이고, 무념무상의 안착이며, 무아의 경지로 들어가는 ‘열림이자 깨어있음’입니다. 자각하는 의식으로 흐르는 상태, 깨어있음만이 불타고 있는 상태, 이런 하나가 되는 길, 이것이 네 번째 단계인 절정, 바로 자각의 흐름입니다.
3) 마음챙김 명상의 효과
네 번째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 해도 명상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삶에서 깨어난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경이롭고, 신비한 체험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의 공부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해소되며, 만성통증, 불면증, 불안증, 우울증, 공황장애 등의 증세는 호전됩니다. 면역력 증진으로 잔병치레는 사라지고, 생기발랄한 삶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4. 걷기명상 방법과 효과
많은 사람이 걷기를 통해 건강을 유지합니다. 그저 걷기만 해도 불면증이나 우울증이 호전됩니다. 하루 40분에서 한 시간 정도만 걸어도 건강에 큰 도움이 됩니다. 숨이 약간 찰 정도로 활기차게 걸으면 혈당 조절, 체중 감량, 뼈와 관절의 건강에도 좋습니다. 단순한 걷기에서 한 차원 높은 걷기 명상으로 균형감각은 물론 만성병 예방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습니다. 걸으면서 마음챙김하기에 걷기 명상이라 합니다.
1) 걷기명상하는 방법
걷기 명상은 특별한 장비나 공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몸의 움직임을 느끼며 알아차리는 방식입니다. 걷기 명상의 가장 큰 특징은 도시든 시골이든 걸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명상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걸으며 가장 먼저 느껴지는 곳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발이 땅에 어떻게 닿는지, 아니면 손이 어떻게 흔들리는지 알아차립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면 무엇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호흡을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2) 걷기명상의 효과
걷기 명상은 균형 감각을 개선할 수 있고, 다리와 허리를 강화합니다. 호흡과 혈류를 증가하며 심폐기능을 향상합니다. 집중력이 향상되고 불안증, 우울증 및 불면증을 비롯한 각종 만성병을 개선합니다. 또한 기억력 증진과 활기찬 일상 등 걷기 명상의 효과를 여러 연구 논문에서 입증하고 있습니다. 특히 자연을 벗 삼아 걷는다면, 도파민, 세로토닌 등 호르몬 분비가 늘어 상쾌한 기분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3) 주의사항
주의사항이 있다면, 걷기에 번잡하지 않은 곳이라야 합니다. 다른 명상과 마찬가지로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장소나 분위기는 피하는 게 좋습니다.
공부가 다 그렇듯이 명상이나 호흡할 때는 평상시보다 더 많은 잡념이 올라옵니다. 이것은 정상입니다. 물이 맑아지면, 호수의 바닥이 훤히 드러나듯이 단전호흡이나 명상 중에도 더 많은 번뇌 망상이 일어납니다. 이럴 때는 호흡이든, 몸이든, 가장 잘 느껴지는 것에 온전히 집중하면 됩니다. 억지로 없애려 하지 말고 잡념을 알아차려도 좋고, 호흡이나 몸에 더 세심한 집중으로 스스로 사라지도록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명상이나 호흡법이 그렇듯이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조작하지 않아야 고요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무엇이든 조작하려 하고, 인위적으로 가공하려 합니다. 그러면 명상이 어려워집니다. 호흡도 조절하려 하면 오히려 해롭습니다. 자연스럽게 그저 알아차리는 게 가장 좋은 호흡법이고, 명상법입니다. 걷기명상을 계속하다 보면 마음챙김이나 호흡명상, 또는 다른 명상법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5. 무위와 유의
무위라는 말은 노자로부터 나온 말입니다.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며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을 노자는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유위(有爲)란 인위적으로 조작되었거나, 어떤 조건에 묶여 있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연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유위라 합니다. 이러한 유위는 인연에 의해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의 모든 변화를 의미합니다.
반면에 무위(無爲)란 인위적으로 조작되거나 분별로 나누어지지 않은 생성과 소멸의 변화를 초월한 세계를 뜻합니다.
1) 무위 명상법
모든 명상은 무위법이고, 모든 공부는 무위의 길입니다. 무위에서 나는 사라지고 깨어있음으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위는 나 없음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나 없음이 무슨 뜻이지요? 말이 좀 어려운가요?
나 없음이란 분별하지 않은, 분별하기 이전의 나를 뜻합니다. 무엇이든 안다는 것으로부터 분별이 일어나고, 분별이 시작되면 모든 것으로 나누어집니다. 이 분별로부터 생각이 나오고 감정이 일어납니다. 분별로부터 수많은 분리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온전할 수 없습니다.
나 자신마저도 분별로 나누기 시작하면, 나는 철수라는 이름의 나가 되고, 공무원이라는 신분의 나로 매이고, 아버지라는 역할의 나로 구속되며, 아들이라는 자식으로서의 나로 변질됩니다. 착한 나가 되고, 나쁜 나가 되며, 괴로운 나가 나오고, 부족한 나도 나옵니다. 철수는 그저 이름이 철수일 뿐이고,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역할일 뿐이며, 괴로운 나 역시 상태가 괴로움일 뿐입니다. 나는 철수로 한정될 수 없고, 아픔으로 한정될 수 없으며, 착함이나 어리석음으로 나누어서 고정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러한 분별로 나는 분리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나쁜 사람이라 낙인찍고, 좋은 사람이라며 다가갑니다. 누구든지 나누어 놓으면 수많은 허상이 생겨납니다. 허상이 그가 될 수는 없습니다. 분리된 내가 아닌, 본래의 나는 그 무엇이라 이름 할 수 없기에 ‘나 없는 나’라 하고, 나로 규정하고 한정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본래의 나를, ‘나 없는 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2) 무위의 삶
이 ‘없는 나’는 그저 ‘있음의 알아차림’이고, ‘알아차림으로 있음’일 뿐입니다. 그러면 무엇에도 매이지 않을 수 있고, 스스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으며, 이것이 깨어난 삶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깨어서 살아가는 삶이 무위의 목적이며 명상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 무엇을 하든, 하지 않던, 분별이 사라지면, 함은 함으로써 완전하고, 머묾은 머묾으로 온전하며, 감은 감으로서, 옴은 옴으로서 완벽합니다. 그러면 그 무엇을 하든 하지 않던, 그 무엇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그 자체로서 무위입니다. 규정된 내가 없으니 꾸밈도 필요 없고, 꾸밀 필요가 없으니 조작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저 스스로 그러함으로 흐를 뿐이기에 무위라 합니다.
무위, 나 없음의 흐름에서 나 있음의 자각입니다.
마치는 말
모든 수행과 공부의 핵심은 적적성성입니다. 즉 고요하고 고요한 가운데 맑고 밝게 깨어나는 이치를 이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동양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단연 무위자연입니다. 이 한마디 무위라는 말의 탄생은, 이 우주의 깨어남만큼이나 경이롭고 장엄합니다. 고요를 유지하면, 깨어날 수 있다는 이치를 발견했다는 것은 생명의 위대함입니다.
결국 고요함을 유지해야 깨어날 수 있고, 무위를 통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삶에서 깨어날 차례입니다. 깨어서 살아가야 진정한 생명의 여행을 즐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