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의 철학적 명제와 근원적 질문

 

 

우리말에는 ‘보다’라는 단어가 참 많습니다. ‘먹어보다’, ‘만져보다’, ‘느껴보다’, ‘바라보다’, ‘들어보다’, ‘입어보다’, ‘해보다’, ‘새겨보다’, ‘생각해보다’, ‘타보다’, ‘나누어보다’ 일일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수많은 ‘보다’를 우리가 사용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보다’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을까요?

우리는 ‘보다’를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바라본 세상을 통해 나를 의식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나를 설정하고 선택하고 정의하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세상을 받아들이고 인식하며, 그 인식을 바탕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기에 ‘보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1. 상호작용과 소통의 의미로서 보다.

 

우리는 가장 먼저 눈을 통해 사람을 보고, 또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오감이 있으며, 오감 너머의 육감인 의식을 통해서도 사람들의 표정, 행동, 분위기 등을 보고 받아들이며 그들의 감정과 생각을 이해합니다. 이러한 오감과 오감 너머의 초감각을 통해서도 우리는 외부를 받아들이며 세계를 경험합니다. 이러한 경험은 ‘보다’를 통해 일어납니다.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만들어 낼뿐 아니라, 외부 세계와 소통도 보다로 가능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존해야 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상대방의 표정을 보고 그들의 감정을 파악하며, 그에 따라 적절한 반응을 해야 합니다. 또한 외부 세계의 움직임과 변화를 보고 받아들여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보다’는 나와 외부 세계가 상호작용하는 통로로서 역할이 있고, 내 몸과 의식을 연결하는 통로로서 역할도 합니다. 즉, ‘보다’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상호작용하며 소통하는 역할입니다.

 

 

2. 창조와 경험의 의미로서 보다

 

느껴보고, 생각해 보며, 들어본다고 합니다. 느낌을 볼 수 있나요? 생각을 볼 수 있나요? 들음을 어떻게 볼 수 있죠? 어떻게 만져 볼 수 있지요? 만지면 되는데, 만지며 왜 봐야 하는 걸까요? 느끼면 되는데, 왜 느끼며 봐야 하지요? ‘보다’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다’라는 이 말은 바로 창조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보다’의 의미는 세상이 드러나도록 하는 말이고 드러난 세상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즉, 보아야 세상이 드러나고, 드러나야 받아들일 수 있으며, 받아들여야 인식할 수 있습니다.

 

‘보다’라는 말에는 경험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보다’는 없는 세계에서 존재의 세계를 창조하고, 이를 받아들여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보다’는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이며, 철학적인 명제로서 많은 뜻을 지닌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실제로 실재하는 실체는 없다. 존재란 존재하지 않지만, 의식하는 순간 존재로 의식할 수 있다. 즉, 의식하기에 세상은 드러나고, 드러난 세상을 받아들이기에 나 자신도 의식할 수 있다. 없으면서 있고, 있지만 없는 게, 존재의 의미이며, 이 존재를 세계라 하고 ‘나’라고 의식할 뿐이다. 세상이 있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내가 의식하기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고, 창조한 세계를 받아들이기 위해 나 역시 존재한다.

 

무슨 말씀이에요? 우주뿐 아니라, 나 역시 내가 창조했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우주가 존재하고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논리 아닌가요? 어떻게 우주가 존재할 수 있지요? 그 모든 게 다 내가 투영한 환영에 불과합니다.
환영에 불과하다면, 왜 그런 짓을 하면서 세상을 받아들여야 하고, 나를 나로서 믿으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요? 왜 그런 짓까지 해야 하는 걸까요? 없는 것을 왜 있도록 해야만 할까요?

경험하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내가 설정하고 선택하며 생명으로 여기 오고 싶었기 때문 아닐까요? 보고 싶고 경험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삶을 경험하고 싶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아니라고요? 그런 적 없다고요?

지금까지 살아봤으니,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설정하고 선택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일어나지 않고, 일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지요?

 

경험이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경험하려면, 무언가 있어야 하고, 무엇인가 일어나야 하며, 이를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기억하면서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고, 순간순간 이를 받아들여 의식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의식적인 활동이 바로 ‘보다’입니다. 내가 보지 않으면 그 무엇도 가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보다’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근원적인 세계로 들어가 보면, 존재하는 것은 그 무엇도 가능할 수 없습니다. 이 아무것도 없는, 없음조차 없는 세계에서 뭔가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보다’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기에 세상도 가능하고, 경험도 가능합니다. 나도 가능하고 삶도 가능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존재하는 세계로 인식하는 이유는 바로, 경험을 통해 존재로서 존재하기 위해섭니다. ‘보다’는 그래서 세상을 드러내는 창조적 경험이며, 나를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근원적 경험입니다. 또한 인식하고 의식하는 의식적 경험입니다.

 

 

3. 상상할 수 없는 세계는 없다

 

상상할 수 없는 세계는 가능하지 않고, 그 어떤 세계라도 보다를 통하지 않은 세상은 의식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상상할 수 있을 만큼의 세계만 드러날 수 있고, 볼 수 있는 범위에서 세상도 경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상상하기에 드러낼 수 있고, 드러날 수 있어야 의식할 수 있으며, 의식하기에 그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의식할 수 있는 세계만이 세계의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상상해 보고, 추측해 보고, 탐구해 보고, 드러내 보기에 세상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본다’와 ‘못 본다’로 나눈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겠지만, 좀 더 이해할 수 있도록 둘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세계를 드러낼 수 있고, 또 의식을 통해서 볼 수 없는 세계까지 의식하며 경험할 수 있습니다.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세계는 형태로 받아들여 보고,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상징으로 받아들이며 의식합니다. 내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은 형태 아니면 상징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말은 세계는 형태와 상징으로 이루어졌고, 이 모든 것은 의식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본다는 뜻은 이미 의식으로 펼쳐내고 있다는 뜻이고, 의식한다는 의미는 이미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요?

의식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외부 세계든, 나 자신이라 여기는 나도 역시 의식이 창조한 환영이기에 실제로 실재하는 실체라는 건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한국의 고유 수행법인 선도를 공부할 때, 호흡을 이용하여 기운을 다스리고, 호흡에 집중하며 명상에 들어갑니다. 이때 들고나는 숨을 바라보고 느껴가며 알아차리라 합니다. 무슨 공부든 다 마찬가지로, 화두를 들든, 신을 받아들이든, 만트라를 외든, 모든 공부는 집중하는 그 대상을 바라보고 느끼며 알아차리면서 하나 되기 위해 집중 너머의 몰입으로 들어갑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왜 보라 하는 것일까요?

 

보면 집중할 수 있고, 집중을 유지하면 몰입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몰입해야 고요할 수 있습니다. 몰입의 고요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고요하고 고요하되, 맑고 밝은 가운데서 드러나는 세계가 있습니다. 이게 나 자신을 열고 깨어나서 바로 보려는 이유입니다.

보고 느끼며 알아차리면 어떻게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가 하나가 되며, 하나로서 깨어날 수 있게 되는 걸까요?

뭘 볼 수 있지요? 나를 볼 수 있어요. 왜 나를 봐야 하지요? 내가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모든 세계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실재하고 세계가 실체로 존재한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실체가 아니기에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느껴볼 수 있고, 드러낼 수 있고, 만져볼 수 있고,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의식할 수 없는 세계는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기에 의식할 수 있습니다. 의식할 수 없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의식하기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드러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의식하기에 드러나고, 보기에 볼 수 있는 세계라서 ‘보다’는 창조이며 창조를 통한 의식의 경험입니다.

 

4. 경험한다는 뜻은

 

‘보다’라는 이 한마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공부를 참 좋아하는 민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나 ‘하늘’이라는 말이 나를 의미하고, 내가 이미 온 우주라는 뜻을 이해할 줄 아는 민족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런 말은 근원적인 공부, 즉 자신의 찾아가는 공부를 통해서만이 밝혀낼 수 있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정리해 봅니다.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의식하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보다’를 통해서 나 자신과 세계를 드러내며 경험의 세계를 누려갑니다. 삶이나 생명. 그리고 의식 역시 경험하기 위한 설정이고, 나와 세계는 존재하기 위한 선택입니다.

 

이게 우리가 이 세상을 누려가는 방식입니다. 세상이 드러나는 원리와 형상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이유도, 이러한 ‘보다’를 통해서 의식할 수 있기에 가능합니다. 이게 세상을 창조하는 방식이고, 경험을 누릴 수 있는 이유이며, 내가 존재하는 까닭입니다. 이것은 기적이자, 신비이며, 놀라운 발견입니다.

 

허상의 의식 세계를 현실의 실체 세계로 받아들이며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술, 문학, 철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로 의식 세계를 펼쳐갑니다. 작가와 예술가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 내며 또 다른 현실 세계를 펼쳐냅니다. 과학자들은 놀라운 상상력으로 새로운 세계를 펼쳐가며 창조하고 개벽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문명이라 하고, 예술이라 하며 과학이라 하고 문화라 합니다. 이 모든 걸 왜 만들어 낼까요? 오직 경험하기 위서 아닐까요? 나와 이 세계가 그렇듯이 경험만이 나의 이유가 아닐까요?

 

 

5. 삶을 풍부하게

 

나는 보고 의식은 창조합니다. 뜻으로 드러나고, 드러나기에 봅니다. 의식이 바로 뜻이고, 뜻이 바로 의식입니다. 나는 의식의 창조물이고, 의식은 나의 창조력입니다. ‘보다’와 창조, 그리고 경험은 동시성이고 일체성입니다. 그래서 나는 세계를 창조하고, 세계는 나를 가능하게 합니다. 나는 의식하고 의식은 나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실체로서 실제로 실재한다고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의식은 창조의 세계를 펼쳐내고 나는 경험하며 의식합니다. 허상의 세계에서 우리는 뜻하며, 뜻을 현실로 드러냅니다. 드러난 세계를 경험하며 삶을 경영합니다. 설정하고 선택하며 허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를 계속 창출합니다. 이유는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 경험만이 삶의 이유고, 생명이 여행을 시작한 동기입니다. 여행은 경험이고, 풍부한 경험을 통해 삶을 아름답게 누려갈 수 있습니다. 다만, 나의 의미를 탐구하고 생명의 이유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경험을 아름다운 삶으로 보다 더 아름답게 승화할 수 있습니다.

 

‘보다’를 통해 창의성과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고, 의식의 확장과 깨어남을 통해 경험을 즐길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을 보다 더 풍요롭게 누려갈 수 있습니다.

 

결론

 

나는 의식하고, 의식하기에 나는 존재한다.

지금까지 장황하게 이야기했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를 찾아가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되기 위해 깨어나지 않으면, 이해할 수도 없지만, 이해할 수 있더라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결국 깨어나는 수밖에 달리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나 자신이 되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현재의 삶이 힘들고, 괴로움이 나를 지배한다면, 더욱 공부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보다’라는 철학적이고, 근원적인 명제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가 무엇일까요? 경험의 세계를 통해 살아가는 우리가 이 ‘보다’의 의미를 새기며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우리는 ‘보다’를 통해 세상을 경험하고 이해하며, 우리의 의식을 확장하며 깨어나는 삶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보다 풍부한 경험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이를 통해 더욱 풍요로운 삶을 누려갈 수 있습니다.

 

나는 더 다양한 세계를 펼쳐낼 수 있고, 더 아름답게 의식할 수 있으며, 풍부한 경험을 만들어 가며 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보다’는 창조를 위한 무한가능성이며, 생명의 존재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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